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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낙태(落胎, Abortion) 금지론과 반박

낙태(落胎, Abortion) 금지론과 반박

1.1. 그 어떤수단으로도 살인은 허용할 수 없다

가장 강력하고 대표적이고 대부분의 낙태반대론자들이 말하는 주장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온갖 경제적 어려움이 있을 수 있고 삶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인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낙태 역시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견해다. 태아를 어느 시점부터 생명으로 보는가는 많은 논란이 있는 주제이지만 출산의 순간을 생명 탄생의 순간으로 보지 않는다면 살아있는 생명인 태아를 낙태하는 것은 살인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생후 n주된 태아부터 생명이라면, n-1주가 된 태아를 낙태하는 것은 가능하지?’라는 다소 타협적인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수정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생명이다’라는 견해를 주장하게 될 경우, 낙태는 그 어떤 수단으로도 허용할 수 없는 살인행위가 되는 것이다. ‘수정되는 순간 부터 생명’이라는 견해는 가톨릭이 지지하는 견해이며 굳이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많은 비종교인들도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동의하지 않는 비종교인들도 적은 숫자가 아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생명이란 무엇인가?’,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떡밥에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또한 수정란이 생명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그렇게 따지면 정자와 난자도 생명이냐는 반박이 있다. 하지만 극단적인 낙태 반대론자들도 이러한 관점을 가지는 경우는 없다시피하다. 심지어 낙태를 금지하는 종교들도 정자와 난자는 생명으로 보지 않는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장성한 인간이 되지는 않는 정자와 난자가 최적의 조건에 있으면 장성한 인간으로 자라는 수정란과 같은 취급을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운동성을 근거로 정자를 생명이라고 한다면 역시 운동성을 가지고 있는 백혈구 역시도 생명이 된다. 애초에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수정란에게, 정자와 난자와 같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은 낙태 금지론자뿐만 아니라 허용론자들 사이에서도 거의 없다.

1.2. 생명경시 풍조

위의 의견과 연관된 문제이다. 낙태가 합법이 되면 여성들이 ‘임신에 대해 가벼운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아이를 키울 만한 능력이 있는데도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낙태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태아를 인격체가 아닌 소유물로 인지하게 된다는 말이다. 실제로 우리 나라의 낙태률은 세계적으로 꽤 높은 축에 속한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낙태의 이유로 경제적 어려움을 뽑았는데 싱글맘의 경제적 수준의 통계를 보면 알수 있다. 엄연히 피임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낙태율이 높다는 것은 성관계 당사자들의 안일한 판단과 성개념 부족뿐만이 아니라 여성이 성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갖추어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무지가 팽배해 있을 경우엔 당연히 성관계로 인한 임신이 늘어나고 임신이 되었을 경우에 선택이 결혼/미혼모/고아원/낙태로 나뉘는 가운데 가장 부담이 되지 않는 선택이 낙태가 되어버린다. 생명의 존엄성이 무게있고 함부로 말해선 안 되는 분위기라고 하지만 그것은 이미지일 뿐 실제 겪는 인간의 인생에 있어서는 중요도를 잃어버릴 정도로 생명에 대해서 충분히 혹은 감히 논의된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사단이 난 것으로 보인다. 기억하자! 합의하고 성관계를 가지는 경우 임신에 대해서도 논의해야만 진정한 합의라는 것을.

1.3. 낙태가 안되면 피임을 하면 되지

하지만 대한민국의 피임률은 낮은 편이다. 질외사정은 피임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 유화책에 가까운데 낙태를 금지하는 대신 피임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피임에 실패한 사람들에 한해 허락하면 되지 않겠냐는 주장이다. 문제점은 피임 실패한 사람과 그냥 낙태하고 싶은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이 아직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에도 낙태보단 피임이 권장되며 방법도 훨씬 쉽기 때문에 피임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사실 피임 실패자를 제외하고는 낙태와 피임 중에서 피임을 피할 이유는 없다.

강간 피해자는 애초부터 낙태와 피임 중 선택할 수 있었던 입장이 아니므로 논외. 강간 피해자는 모자보건법에 의해 낙태가 합법이다.

현대 피임 기술은 매우 신뢰도가 높기 때문에 피임약 + 콘돔을 시행 한다면 임신 가능성이 현저하게 하락한다. (자세한 내용은 피임에 대한 글을 참고) 다만 피임약이 굉장히 몸에 해롭기 때문에 여성의 경우 몸에 상당한 부담이 가고 대부분 콘돔에 피임 방법을 의존할 수 밖에 없지만 콘돔의 내구성은 항상 복불복이다. 따라서 관계시에 콘돔이 찢어지는 사례, 원래 찢어져 있는 사례등의 경우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것을 예견하긴 힘들며 이런 경우에 피임 실패가 발생하게 된다. 실질적으로 피임약 + 콘돔의 피임 방법은 생각 이상으로 성립되기 힘든 사례이며 피임 실패율은 생각 이상으로 높다고 할 수 있다. 막말로 몸에 해로운 피임약을 매번 먹을 수 있는 여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게다가 그 어떤 피임방법을 써도 피임 확률은 100%가 아니다. 심지어는 3가지 이상의 피임방법을 다 겹쳐 사용해도 100%가 아니다. 피임이 실패할 확률이 10만분의 1이라고 해도 한국에 1000만 쌍의 성관계가 가능한 커플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들이 1년에 관계를 10번만 맺는다고 생각을 해도 1억번의 관계가 생기는 것이며 그럼 1000번은 임신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확률적으로 아무리 많은 피임 방법을 동원해도 원치 않는 임신이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물론 대다수의 커플은 피해가겠지만 재수없는 소수의 누군가는 피임을 해도 임신을 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한국에서는 질외사정법을 피임방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고 세 가지 방법은 커녕 두 가지 방법도 겹쳐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1.4. 낙태가 안되면 그냥 금욕을 하자

주로 종교계에서 주장한다. 성교가 생명의 탄생과 격리된 채 유흥거리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비판하는 가톨릭의 교리에 근거한 것이며 타종교인이나 비종교인은 받아 들일 수 없는 부분도 있으므로 참고만 하기 바란다.

대전제로 우선 남녀 모두 혼전순결 지키시고

아이 최대한 많이 낳으시고

1번이 어려우면 원하는 자녀수를 확보한 이후에는 성교를 그만하시고

그래도 성교가 하고 싶다면 상대적으로 안전한 날에 인공피임 없이 관계하세요.

다만 ‘이때 임신한다면 아이를 원망하지말고 은총으로 여기세요’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게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2번에 관해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가능에 가깝다. 당연히 평신도들도 성욕이 있고 현실적으로 부부관계가 자녀목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정자의 수명이 달라지기 때문에 안전한 날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정자의 수명은 3일 정도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정자의 생존이 길어지기도 해서 ‘안전한 날이 이 날이다’ 특정하기가 힘들다. 물론 남자가 정관수술을 받거나 여자가 난관을 들어낸다면 별 문제가 없겠으나 이것도 교리에 어긋난다. 정관수술의 경우 미혼 남성의 경우에는 병원에 따라서는 거부받는 경우도 있으며 (당장 미혼 남성 정관수술을 검색 해봐도 알 수 있다.) 수정란 시점에서부터 생명이라는 원리에 따르자면 유력한 피임 수단이 몇가지 정도 제외된다. 그리고 신도든 신도가 아니든 금욕 자체가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을 뿐더러 그런 비현실적인 도덕교리를 모두에게 법으로 강제해야 하는 이유 자체가 사회 모두에게 납득할 만한 설명이 가능하지 않으면 안된다.

1.5. 출산율 문제

우리 나라가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출산율이 하락하자 낙태를 엄격히 금지시키면 출산율이 증가하지 않겠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낙태를 금지시키면 출산율이 증가하기는 할것이다. 하지만 고령화 사회는 출산율이 적은 것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낙태를 철저히 금지시킨다고 고령화 사회가 해결될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이런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어떤 삶을 살겠는가? 가뜩이나 경력자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저런 신입에 해당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결론적으로 다수의 젊은이가 다수의 노인을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닌 소수의 젊은이가 다수의 노인+실업 젊은이를 먹여 살리는 꼴이 될 것이다. 출산율을 근거로 낙태를 반대하는 건 애시당초 인도주의적 원칙에도 크게 어긋난다. 실제로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을 낙태 반대에 대한 비난과 연관시키려는 시도가 실패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낙태 반대자들도 이 부분은 크게 주장하지는 않는 편이다.

한국 갤럽의 통계에 따르면 1994년도에 태어난 신생아수 72만 명의 두 배가 넘는 150만 건의 낙태가 있었다고 하나 이 통계에 따르면 매년 잉태 건 수가 250만 건이 넘었다는 이야긴데, 이는 당시의 거의 모든 가임 여성들이 임신해야 가능한 이야기로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여성이 1년에 한번만 임신하는 것은 아니고 한 여성이 1년에도 낙태를 여러번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므로 무조건 조작된 통계라고 보기도 힘들다.

1.6. 부작용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로 주장하는 것이 바로 부작용 문제다. 밑에도 써있지만 과학이 많이 발전했다고 해도 인공적인 유산이다보니 부작용을 없앨래야 없앨 수가 없다. 수술 방법이 마구 긁어내는 식이라 자궁에 상처가 안날 수가 없고 실제로 낙태를 받은 여성 중 10%가 골반염증성 질환을 앓고 있다고 한다. 낙태를 자주 할수록 유산, 불임 확률이 증가하고 부작용도 높기 때문에 건강을 위해서라도 낙태를 금지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정서적인 후유증도 문제점으로 지적하는데 자진하여 낙태를 한 여성들도 40%가 정서적으로 죄책감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강제적인 낙태는 정서적으로 큰 피해를 주며 심하면 자살까지 이르게 되기도 한다. 이를 예방하기 위하여 정신적 치료를 병행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게다가 이혼 사유에 해당하는 법적 부작용도 있다. 낙태 자체가 이혼 사유가 되지는 않지만 낙태 주변에 이혼 사유가 하나라도 성립되는 경우가 많아 낙태 자체가 이혼 사유나 거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1.7. 남아선호사상

연간 수십만 명의 여아 낙태가 이루어졌다. 이건 낙태의 이유 중에서도 가장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경우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윤리 의식이 들어 차면서 이런 부류들은 지속적으로 줄고 있고 그에 따라 이 주장도 약해지고 있다. 현재는 남아선호사상이 많이 사라졌으며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여아를 원하는 경향이 좀 더 짙다. 하지만 80, 90년대에는 이 사상이 극에 달해 남녀 성 비율이 무너지고 불법적인 낙태율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80-90년대의 여아 낙태 문제를 참고) 다만 아직도 태아의 성 때문에 낙태를 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다. 요즘은 역차별적으로 남아란 이유로 낙태를 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전 처럼 호락호락하게 일을 벌일 수 있지는 않기 대문에 매우 소수에 불과하다. 오늘 날에는 반대로 여아선호가 훨씬 강하기 때문에 합법이라면 남아란 이유로 낙태를 하는 경우가 대량 발생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오늘 날의 흐름에 역행하여 여아란 이유로 낙태를 하는 사람도 있고 이상하게도 제법 많은데 소수의 좀 많이 극단적인 사람들의 업적인 듯하다. 전반적으로는 더이상 남아를 원하는 경향은 없고 오히려 그 반대라 봐야 하지만 한국 특유의 악습인 부모의 과다한 간섭+하필이면 그 부모가 꼰대인데다 전 세대의 병크가 병크인지 모름 + 시대의 변화를 모른 채 지독한 남아선호사상을 유지함으로 인해 하릴없이 여아 낙태를 해야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놓인 경우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과거의 여아 낙태는 정말이지 말로 다 표현하기가 힘든 윗세대의 희대의 병크 짓으로 지금까지 이것때문에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문제들은 쉽게 고쳐지기가 힘들어 졌다. 남초문제와 이로 인한 국제결혼의 문제점들, 그리고 극심했던 여아낙태로 줄어든 여성의 수와 이로 인해 직결되는 출생아수 저하 등, 고쳐나가야 할 점이 한둘이 아니다.

1.8. 인육캡슐

인육캡슐은 주로 태아를 이용해서 만들어 진다. 그런데 그 태아를 구하는 곳은 주로 병원이다. 절도를 하거나 의사가 판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당연히 이 태아들은 낙태를 통해 구해진 태아들이다. 이런 낙태된 태아들은 주로 중국에서 구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중국의 출산 제한 정책으로 30년간 낙태된 태아들이 3억을 육박하기 때문이다. 결국 만병통치약이라는 헛소문 때문에 인육캡슐은 중환자들에게 신나게 팔려 나가다 결국 판매자들은 검거 되었다. 물론 우연히 죽은 태아도 이용했지만 주로 이용한 태아들은 낙태된 태아들이었다. 물론 국가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겠지만… 황당하기 그지 없겠지만 아직 처벌 방도는 관련 법이 존재하지 않아 단지 입국을 거절당할 뿐 전혀 없다. 설마 그런 걸 먹겠냐 싶으니 법에서 관리를 하지 않은 것인데 사건이 터지고 나서 부랴부랴 태아 등 시체 가공품 수출입자를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는 관세법 개정안을 올렸다. 근데 이 법률이 국회에 계류 중이라고 한다. 기다려볼 수 밖에 없다.

1.9. 개인의 자유에 대한 책임

본인이 한 행동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낙태의 대부분의 이유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젊은 날의 과오이거나 가난 때문인데 이런 경우 피임만 제대로 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다.그러니까 ‘책임 못 질 거면 싸지르지 마’. 그러나 현실적으로 부모에게 아이를 책임 질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한다고 해서 그들에게 책임 능력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경제적으로 아이를 양육할 능력이 없는 부모가 낙태를 하려고 했을 때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가 져야 한다고 낙태를 막는다고 해서 부모에게 경제적 책임 능력이 마법처럼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경제적 능력이 없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평생을 불우하게 살 가능성이 크고 이 경우 부모의 무책임한 행위로 인한 피해를 아이가 뒤집어쓰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는 부모의 무책임한 행위로 인한 책임을 아이에게 전가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이의 삶을 부모가 책임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을 강요한다면 결국 부모에게 현실적 책임 능력이 없으므로 아이의 삶에 대한 책임은 아이에게 전가되어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또 피임은 성행위 당사자 남녀 두사람에게 모두 요구되지만 콘돔을 사용했을 경우 남성이 여성을 속여서 콘돔을 제거하는 것이 가능하고 (!) 임신이 되었을때 남성이 책임을 회피할 확률이 높고 임신과 출산, 육아의 부담은 오롯이 여성만이 담당하게 되어 여성의 인생에 심각한 피해를 주게 된다. 물론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성교육의 필요성은 찬반 양쪽 모두가 인정한다. 그러나 피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신한 경우 책임은 누가 지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1.10. 종교적 관점

종교계에서는 밑에서 보다시피 대부분 반대를 하고 있다. 가장 주된 의견은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해 줘야 된다는 것이다. 물론 종교는 정치에 관여할 수 없으나 종교가 있는 사람들은 종교가 없는 사람들과 달리 종교로 인해 도덕적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종교 때문이 아니더라도 본능적으로 낙태를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현재 한국은 종교의 비율이 굉장히 크기 때문에 정치인들은 거의 대부분 낙태찬성을 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민 대부분의 성향 자체가 보수적인 면을 보이기 때문에 종교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도 낙태를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나라는 외국과 달리 낙태의 부작용 등 여러 부정적인 면을 어렸을 때부터 가르쳤기 때문인 듯 하다. 여성 운동가들은 낙태는 여성의 자유라 주장하지만 종교인은 이에 대해 태아도 생명이기 때문에 ‘여성의 자유를 위해 살인을 하겠단 말인가?’라고 말한다. 태아가 생명인가는 어느 쪽의 의견도 옳다할 수 없는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러나 한편으로는 낙태를 허락하면 임신 걱정이 줄어 매춘부가 늘어날 것이라는 이뭐병*스러운 의견도 있다. 이는 궤변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게 그럼 현존하는 매춘부들은 다들 불임이라서 매춘에 종사한다는 소리 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피임약과 콘돔이라는 예방책이 있고 한번 낙태를 하면 한동안 성관계를 금해야 하기 때문에 굳이 신체적, 금전적으로 부담이 가는 임신이나 낙태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피임에도 엄연히 실패율이 있다. 콘돔은 무려 10%에 달해서 의사들이 여성도 피임약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거기다 매춘부는 성행위 횟수가 일반인 보다 많기에 피임 실패율도 늘어나니 몸값 비싼 매춘부는 낙태를 받기도 한다. 다만 그런 경우는 적고 그런 사람들은 낙태를 불법으로 놔두어도 잘만 해댄다. 자발적으로 매춘부가 되는 경우라면, 설령 늘어난다해도 종교계가 이래라 저래라 할 이유는 없다.

1.10.1. 천주교

천주교에서는 낙태를 적극 반대한다. 특히 1995년 로마 교황청에서 발표한 새 ‘교황 회칙’에 의하면 “낙태는 윤리적인 무질서이며 안락사와 더불어 어떠한 인간의 법도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없는 범죄”라고 규정한 바 있다. 왜냐하면 교리상 인간이 수정되는 그 순간부터 영혼이 깃든다고 보며 따라서 생명으로서의 존엄을 수정란일 때부터 갖추므로 배아도 단순한 세포가 아닌 엄연한 하나의 인격체인 인간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미 교회 초창기부터 세례를 받지 못한 채 죽은 영유아의 구원에 대해 치열한 신학적 논쟁이 오늘날까지도 오가는 상황에서 교리 차원에서라도 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낙태에 대해 천주교가 이를 수용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진보적인 성직자들조차 피임이나 동성애는 물론 혼외출산까지 용인할지언정 낙태는 무조건 반대하는 입장이다.

교리적으로 이 문제는 가톨릭 교회가 생명 윤리와 관련된 한 단 한 발자국도 양보할 수 없는 문제들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는 만큼 가톨릭 교회가 이러한 입장을 조금이라도 번복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생명윤리에서 가톨릭이 일관적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는 가톨릭은 같은 이유(생명 윤리)로 사형제에도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톨릭이 다수를 차지하거나 그 영향을 크게 받은 브라질, 프랑스, 이탈리아 같은 국가들을 보면 대부분 사형제가 없고, 아무리 가혹하게 처벌해도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 법정 최고형이다. 다만 임산부의 생명이 위험할 때와 같은, 흔히 말해 ‘어쩔 수 없는 경우’의 낙태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많은 신학자들과 교회 내의 철학/윤리학자들 간의 논쟁이 있지만 대략 일반인들에게도 쉽게 다가올 수 있는 근거로는 ‘더한 악(산모와 태아가 같이 사망하는 것)보다는 덜한 악(태아만 사망하는 것)을 택하는 것이 낫다’가 있다. 물론 일견 타당해보이는 이 근거를 둘러싸고서도 수많은 머리 아픈 공방전이 일어나고 있다. 일반 사회에서는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조차도 이 경우만큼은 다수가 불가피하다고 보지만 천주교인들 중 보수적인 입장의 천주교인들은 이조차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일단 이와 관련한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은 “임산부의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더라도 낙태는 정당화될 수 없다”이고, 보통 강간 피해나 산모의 건강이 문제되는 경우는 낙태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에게 답답한 주장이다. 당연히 “강간으로 인한 원하지 않는 임신에 대한 낙태도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이유로 가톨릭 교회는 현재 모자보건법 14조의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입장이고 현실으로 관면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현대 사회에 강간으로 임신한 아이를 끝까지 지키겠다는 산모 혹은 그 가족이 과연 많을까? 비록 산모가 아이를 키우겠다고 하더라도 결국 가족에 의해 힘든 선택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매우 민감하고 또 중대한 문제이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위와 같은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낙태를 한 신자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 교회가 굳이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이유는 이들의 교리상 어떠한 경우에도 낙태는 교회가 한 치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개방적인 프란치스코 교황조차도 낙태를 막기 위해 혼전 임신과 출산에 관대해지자고 했을 정도다. 즉 이런 대원칙에 하나둘씩 예외 조항을 교회법 혹은 교리상으로 끼워넣다보면 결국 대원칙 자체가 흔들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며 2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교회는 그런 결과를 초래한 많은 사례들을 이미 겪어왔다. 따라서 이런 문제들 역시 재치권자 혹은 사목자의 사목적 배려를 통해 해결할지언정 교회 자체의 원칙에서는 한 발자국도 물러날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향 때문인지 가톨릭의 교세가 큰 아일랜드, 폴란드 및 남미의 여러 나라에서는 낙태가 불법인 경우가 많다. 특히 아일랜드에서는 아예 헌법까지 바꿔가며 태아에게 생명권을 보장한 극단적인 경우이다.

낙태와 관련해서 2015년 5월 8일, 2016년 ‘자비의 특별 희년’ 기간에 낙태 여성, 낙태 시술을 한 의사와 간호사 등 낙태와 관련된 사람들을 용서하기 위해 교황이 사제단을 세계 각국에 파견할 것이라고 언론이 보도했다. 이러한 조치는 교황이 선포한 자비의 특별 희년 기간에만 허용되는 것이 당초 계획이었으나, 자비의 희년이 종료된 후인 2016년 11월 21일 낙태한 여성에 대해 면죄할 권한을 주교급 사제에서 모든 사제로 확대시킨 자비의 희년 때 조치 기한을 1년에서 무기한으로 연장했다 . 이와 별도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한국의 경우 낙태한 여성에 대한 자동파문의 사면이 본당 주임신부에게 위임되어 있다.

1.10.2. 개신교

개신교도 가톨릭과 같은 기독교 계열이기에 낙태에 반대하는 입장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개신교는 단일 교파가 아니어서 그 허용범위가 갈린다. 특히 진보적 교단과 보수적 교단은 그 기준이 크게 갈라진다. 다만 낙태금지라는 근본적 주장은 모두 같다. 하지만 이 뉴스나 이 뉴스를 보면 알겠지만 미국의 복음주의 성향을 강하게 보이는 교파는 가톨릭보다도 보수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모습을 보이는지라 낙태에 대해서도 더 엄격하게 적용할 때도 있다. 하지만 상기했듯이 교파마다 입장이 갈리고 개신교 전체를 합산하면, 가톨릭에 비해서는 덜 엄격한 편이긴 하다. 즉, 강간으로 인한 임신의 경우나 산모가 위급한 상태(지카 바이러스에 감염된 경우 포함)에서 낙태를 하는 경우에는 천주교보다는 덜 강경하다.

1.10.3. 이슬람교

쿠란 등에서는 ‘자식을 살해하는 것’을 죄악으로 규정하고 있고, 이 구절에 따라 대부분의 이슬람교 국가들에선 산모의 생명이 위험할 때를 제외하고 낙태가 금지다. 다만 기독교에서는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는 순간(…) 하느님이 생명을 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이슬람에서는 아이의 살과 피가 만들어지고 120일 후에 하나님이 생명을 불어넣어준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쿠란이 ‘자식을 살해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건 맞지만, 여기서 말하는 ‘자식’은 4개월 이상의 태아인 것이다.

일단 ‘하디스’에서 무함마드가 밝힌 아기가 탄생하는 과정은 이렇다.

너희들의 창조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정액의 형태로 40일간은 그 정액이 응혈되고 그 다음 40일간은 살덩어리가 되느니라. 그리고 나서 알라께서는 천사를 보내시는데 그 천사는 그(그녀)에게 영혼을 불어 넣느니라. 천사는 다음과 같은 4가지를 기록 하라고 명령을 받느니라. 그(그녀)의(얻을) 양식, 일생, 행위및 선한 사람일지 악한 사람일지가 바로 그 4가지이니라. 그분외에는 숭배받을 존재가 없는 알라께 맹세하니 너희들 중 누군가 천국에 들어 갈 자들의 행위를 실천하여 그(그녀)와 천국 사이에 한 척(46-56cm) 거리가 남았지만 그(그녀)가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기록된 정명이 그러하다면 그(그녀)는 지옥에 들어갈 자들의 행위를 실천하고 지옥으로 들어가게 되느니라. 또한 너희들 중 누군가 지옥에 들어갈 자들의 행위를 실천하고 그(그녀)와 지옥사이에 한 척 거리가 남았지만 그(그녀)가 어머니 배속에 있을 때 기록된 정명이 그러하다면 천국에 들어갈 자들의 행위를 실천하여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느니라.

그러니까 요약하면, 이슬람 종교관에서는 남성의 정자가 여성의 자궁에 들어가 피와 살로 변하다가 120일 후에 영혼이 만들어지며, 다시 말하면 4개월 미만의 태아는 남성의 정자가 변한 그냥 고깃덩어리 1이다. 즉, 4개월 미만 태아는 ‘생명’이 아니며 낙태가 허용된다. 그냥 정자 내지 고깃덩어리를 자궁에서 빼내는 것이다.

이후 4개월이 넘은 태아는 영혼이 숨쉬는 ‘인간’으로 보며 이 시점에선 낙태는 살인죄다. 120일이 지난 후 영혼이 만들어지면, 그 때 산모와 아버지는 부모가 되며 아기의 생명이 만들어진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쿠란에선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는 것을 심각한 죄악으로 본다.

다만 여성의 생명이 위험할 경우 허용한다는 것이 교리로 명시되어있다. ‘태아의 생명과 산모의 생명 모두 소중하지만 산모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엔 어머니를 택하는 게 옳다’고 본다.

요약하자면 금지는 금지지만 의외로 해당 문제에 관해서는 기독교보다는 관대한 편이다.

1.10.4. 유대교

이슬람교와 마찬가지로 유대교에서도 산모와 아이의 목숨을 둘 다 책임지지 못할 경우에는 낙태를 허용한다. 탈무드에 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이때 유대교 교리에 따르면 아이는 태어나기 전까지는 개별적인 생명이 없는, 신체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생명이 위태로울 경우 팔이나 다리를 자르는 것처럼 아이를 희생시킬 수 있는거라고 말하는데 이때 기독교 신부와 격하게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유대교 교리에 따르고 아이를 잃게 되지만 나중에 다음 아이를 낳아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물론 이 경우도 언제까지나 산모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로 한정된다. 당연히 다른 경우는 가차없다.

1.10.5. 불교

불교 역시 낙태에 있어서는 극도로 부정적이다. 불교의 경우 살생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니 말할 것도 없다. 일본 불교의 경우, 낙태아의 영혼을 공양하는 ‘미즈코(水子)’ 공양이라는 의식을 마련하고 있다. 미즈코 공양은 일본에서 낙태가 일반화된 1970년대 이후에 흔히 나타난 것이다. 이는 불교적인 의식보다는, 일본의 원령 신앙이 낙태아에게까지 확대된 것에 가깝다. 한국 불교에서도 유산 영가(유산된 아기의 혼)를 위로하는 천도제를 지내는데 물론 이중에는 자연 유산도 있지만 낙태아도 포함된다. 이러한 유산 영가 천도를 전문으로 하는 절도 있다.

1.10.6. 증산도

증산도 경우 낙태를 세계 종말의 징조로 까지 보고 있다. 교조 증산은 “뱃속 살인은 천인공노할 죄악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했으며 낙태아 뿐만 아니라 ‘처녀나 과부의 사생아와 그 외에 모든 불의아와 압사신과 질사신이 철천의 원을 맺어 탄환과 폭약으로 화해 세상을 진멸케 한다’라고 유달리 낙태의 죄악을 강조하였다. 여담으로 바람 피우는 것이나 스와핑도 강하게 비판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낙태를 한 사람을 단죄하는 것보다는 낙태의 예방에 치중하고 있으며 어쩔 수 없이 낙태한 경우 죽은 아이를 위해 필히 천도제를 지내줄 것을 강조하는 정도.

1.10.7.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토착 신앙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의 토착 신앙에서 꿈 속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불사의 존재라고 믿는다. 이 불사성은 개개인의 생명이 있기 전에 있었던 것으로, 개인으로서의 존재가 끝날 때 다시 시작된다고 한다. 태어나기 이전이나 죽은 이후에는 꿈 속의 ‘영혼 아이’(spirit child)로서 존재하고, 이 아이는 어머니의 태를 통해 태어남으로써 생명을 다시 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영혼은 임신 5개월때쯤 발달하고 있는 태아 속으로 들어간다고 믿어진다. 쓸데없이 구체적 어머니가 자궁 속 태아의 태동을 처음 느끼면, 어머니가 서 있는 땅의 정령이 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에게 그 고장의 꿈 이야기와 ‘노래길’(songline)을 가르친다.

1.11. 반박

정교분리에 관해서는 허용론 부분을 참고. 이 정교분리 주장에도 반박이 엮여있는지라 이쪽으로 옮기기가 힘들다.

부작용 문제는 낙태 금지론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근거이기는 하지만 낙태 허용론자들은 딱히 반박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부분이다. 개인의 선택에 의한 낙태가 허용된다면 그 결과로 돌아오는 건강상의 부작용은 그 선택을 한 개인이 책임져야 할 영역이라고 보기 때문. 즉, 누군가가 아이를 키울 수 없어서 낙태를 선택했다면 그 선택은 시술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부담을 감안하고 이루어진 것이어야 하며, 부작용을 감수하고 낙태를 선택했다는 것은 그 부작용보다 출산의 곤란함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는 것인데 이러한 개인의 가치판단에 사회가 개입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태아의 생명권과 같은 문제는 사회적 윤리에 따라 판단해야 할 문제지만, 개인의 건강 문제는 개인의 판단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고, ‘개인의 건강에 해악을 끼치기 때문에’ 낙태를 금지하자는 주장은 술, 담배, 밤샘 작업이나 놀이, 과격한 스포츠를 금지하자는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주장. 이런 특성 때문에 부작용 문제는 낙태 금지/허용에 대한 논쟁보다는 개인대 개인의 관계에서 낙태를 하려는 사람을 만류하는 데 더 적절한 근거이다.

아이를 낳을 자신이 없으면 성교를 하면 안 된다고 하는 부분은 금주령과 같이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에 가깝기도 하다. 차라리 영구피임 수술을 하라고 하는 쪽이 현실성이 높다. 합의된 성관계는 이미 아이를 만드는 일보다는 쾌락 위주의 이유로 빈번히 행해지며 이를 제지하긴 힘들다. 아이를 낳으라고 강제한다면 통제 능력이 없는 부모 아래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이 다른 사회 문제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27] 거기에 더하여 분명히 피임을 했는데 실패하는 경우도 있으며 얼마 후에 혼인 관계나 연인 관계가 여러가지 이유로 파탄이 나는 경우도 있다. 혹은 결혼한 후에도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았지만 피임이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낙태를 하느냐 마느냐는 부모 본인의 인생에 결부되는 문제이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피임이 실패해 임신한 경우에는 낙태가 절대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미혼모가 되거나 출산으로 빈곤층으로 내몰리는 것이 문란한 여성이 받아야 할 정당한 처벌으로써 실패한 피임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여성에게 돌리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태아를 어느 정도까지 생명으로 여기냐에 따라서 이 선택은 달라진다고 할 수 있는데 만약 뇌가 생기고 자아가 생겨나는 시점이 아니라 수정란부터 생명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수정란만 생명이고 정자나 난자는 생명이 아니냐고 할 수 도 있다. 자아가 없는 수정란도 생명의 시작점이므로 생명이라고 한다면 그 수정란의 시작점이자 수정란이 되기위해서 움직이는 정자나 난자 역시 생명일 수 도 있다. 그렇게되면 남자는 매번 수억의 생명을 고의 살해하는게 된다 생명이 되지 못하는건 남녀의 성교 이전의 정자와 난자이고, 남녀간의 성교가 시작되면 일단 수정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피임 방식은 물리적으로든 화학적으로든 질내 사정시의 수정을 방해하는데에 맞추어져 있다. 수정란 자체가 곧 생명을 발아 시킬 것이므로 정자와 난자와는 전혀 다르다는 말은 수정란이라는 세포를 만들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쏟는 정자와 난자를 방해하는 것은 죄가 아닌데 그 둘이 만나 수정된 순간부터 없애는건 살인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사실 수정란 자체도 그대로 생명이라기보다는 수정란이 운 좋게 자궁 내벽에 안정되어야 생명인가, 생명의 가치는 운인가? 아니면 많은 수의 수정란을 그대로 배출하는 신체 자체는 악의는 없더라도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것인가? 실제로 교회에서는 어느 피임법은 죄가 아닌데 어떤 피임법은 죄나 다름없다고 호도한다.

성행위 시에 수정을 하려고 하는, 생명을 발아시키려고 하는 정자나 난자가 수정란가 뭐가 다르냐는 의문이 극단적인 논리라면 수정 후 몇개월 된 태아를 죽이는 것이나 수정이 된 직후의 수정란을 죽이는 것은, 결국 생명이라는 연장선상에서 똑같이 살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극단적인 논리가 아닌가? 이 경우 정말로 질내 사정 이외에는 허가하지 말아야할 판이다. 더불어 유전자 복제 역시 비슷한 도마위에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대체로 이보다 지키기 쉽거나 통제하기 쉬운 규제같은 것들도 밀어붙이다가 유명무실하게 끝나거나 파탄을 맞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으로는 태아가 보통 사람의 생명과 동급이라고 볼 경우, 선택이 불가능한 약자인 아이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자에 속하는 산모의 목숨을 위해서 낙태를 하는 것도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이와 산모 둘다 죽는 경우만 아니라면 산모의 죽음을 각오하고 낳게 해야한다는 주장도 불가능하진 않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 논리로는 아이를 낳지 못할 정도로 연약한 몸을 지닌 여성이 성교를 하는 것은 어떤 피임이던 실수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여지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체나 사회조건에 따라서 생존권이나 성 결정권을 박탈되어야하느냐고 한다면 그 것 역시 사회내에서 큰 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장애아의 낙태가 부모 혼자의 개인적인 결정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낙태를 결심할 정도의 장애아의 경우 그 전체 인생의 상당 부분을 부모에게 기대는 것 또 한 사실이다. “그들이 행복한 데 왜 죽이려고 하느냐?”는 주장은 반대로 그들의 행복을 위해 부모의 인생을 희생하라고 강요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사회의 도움을 크게 기대할 수 없는 현실에서, 가족 중 중증 질환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가족 중 누군가 혹은 가족 전체가 큰 고통을 받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정신이 멀쩡한 중풍환자의 경우에도 제대로 된 생활을 위해서는 식사, 대소변 받이, 목욕 등을 담당하는 누군가가 필요하며 이런 일을 전담할 시, 다른 개인적인 용무나 사회 생활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요인은 개인 차원에서의 문제뿐 아니라 경제적인 수입 면에서도 확실한 불이익을 불러오는 데, 여기에 주기적인 치료나 수술이 뒷받침 되어야 할 시, 더욱 큰 문제가 발생하며 결국은 모두 다 불행해지는 결과를 나을 수 있다.

육체가 건강하고 정신에만 문제가 있는 경우도 한국에서 장애아와 장애아 가정의 삶은 팍팍하다. 여성 장애인의 경우, 인지 능력의 모자람을 이용하여 성추행,폭행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으며 심각한 사건으로는 경미한 정신 장애를 가진 여성을 마을 단위로 성폭행 한 일도 있었다. 남성의 경우, 신체가 발달함에 따라 더 이상 부모가 장애아를 컨트롤 할 수 없어지고 그로 인해 문제가 왕왕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여성 혼자서, 혹은 주로 여성이 남성 장애아를 돌 볼 경우 이 문제가 심각해 지는 데, 이미 ‘성인 남성의 육체’를 가진 장애아를 여성 혼자 제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장애의 정도가 육체,정신 중 일부에서 극히 미미하게 발현된 게 아니라면, 장애인의 사회적인 진출은 대부분 불가능하며 위의 문제들로 인해 부모가 상시 보호해야 그나마 평범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의 대한 사회 각계의 보조는 경미하고, 인식은 철저히 차가우며, 장애인의 정상적인 행복을 위해 부모의 희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이런 상태가 평생 계속된다는 점을 직시한다면 장애아의 낙태를 선택하는 부모를 단순히 ‘이기적’ 이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낙태가 살인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태아가 어느 때부터 생명인지는 개개인의 윤리적인 판단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그 어느 것이 옳다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위에 명시한 대로 종교마다 교파마다도 모두 다르다. 다만, 태아의 생명권을 근거로 낙태금지를 주장하려면 강간, 근친상간 등에 의한 임신이라는 예외적인 경우에도 절대로 낙태를 허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야 일관성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불가침의 기본권인 생명권이 임신의 정황에 따라 박탈될 수도 있다는 발상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강간당했다고 아이가 죽어야 한다니? 이 모순을 벗어나는 방법은 태아가 절대적인 가치의 생명권을 갖지는 못한다고 인정하거나, 더욱 극단적으로 낙태에 대해 어떤 예외적 허용사례도 두지 않고 태아의 생명을 보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수밖에 없다. 이 중 후자의 주장에 반박하려면 태아가 생명권을 가지는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생명에 대한 기준을 까다롭게 잡는다면 우리는 식물의 생명 역시 간과할 수 없게 된다. 식물은 고통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괜찮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감각기관에 이상이 생긴 사람은 폭력을 가해도 괜찮다는 말도 성립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물을 사람들이 먹는데 반대하는 의견이 없는 이유는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의 생명을 과연 다른 동식물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이 ‘너무 인간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게 아닌가?’라는 비판을 들을 수는 있으나, 엄연히 인간사회에서 ‘인간의 목숨’과 ‘다른 생물의 목숨’의 가치는 다르게 취급된다. 다소 이기적인 사고방식일 수는 있으나, 결국 인간은 곡식과 고기를 먹는 것은 허용해도, 인육을 먹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 생물이며, 살충제는 허용해도 살인가스는 허용하지 않는 생물이다. 즉 암묵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다른 생명보다 더 가치있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태아의 목숨을, 다른 생물의 목숨과 동급으로 취급할 수 있는지는 다소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물론 ‘태아의 어느 시점부터가 생명인가?’에는 수많은 고찰과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할 부분이지만, 인간생명을 다른 생물과 동급으로 취급하는데 동의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해당 태아가 생명이라고 결론이 났다는 전제하에) 태아가 비록 자아도 형성하지 못하고, 감각도 발달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인간이다. 정신지체장애인을 죽이는 것 역시 빼도박도 못하는 살인인데, 태아를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죽이는 것을 과연 합리화하는것이 쉬울까?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해당 태아가 생명이라는 결론이 났다는 전제하에서 성립이 가능한 논리이다. 이렇듯 낙태문제는 ‘생명의 시작은 어느 시점인가?’, ‘인간의 생명은 어느정도의 가치가 있는가?’ 등의 각종 도덕적, 철학적 명제와 직결된 문제이니만큼 단순히 감정적으로 ‘너희들이 그러고도 부모냐?’, ‘애 키우는 게 쉬운 줄 아나?’등의 대응보다는, 보다 진지하고 합리적인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문제이다.

성교육으로 피임법을 알려 낙태율을 줄이자는 의견은 겉으로 보면 참으로 이상적이기 그지없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옳게만 돌아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무리 교육해도 이 세상 어딘가의 철부지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싸지르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고 그런 철부지들을 구제할 가장 쉬운 방법이 낙태니 줄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애초에 낙태를 허락하는 국가들 중에서 성교육을 시키지 않는 나라가 있긴 한 걸까? 물론 성교육의 질적 차이는 구분지을 수 있겠지만 사실 사람들이 모두 이상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한 변수는 언제나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 변수를 어떻게 처리하나에 대해서 국가들이 고심하는 것이지 성교육을 시키느냐 마느냐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런 점에서는 반대 측의 지적 포인트가 어긋났다고 볼 수 있다.

낙태 허용론 반박 부분을 살펴보면 “성교육을 제대로 하면 문제가 상당 수 해결될 것이다”라는 논조이다. 분명 그러한 면은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서는 미성년자에게 성교육을 할 시 성관계에 대한 자세한 묘사를 꺼리는 편이고, 이로 인해 제대로 된 성교육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낮아진다. 또 혼전 성관계에 대한 지나친 부정적인 묘사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신체적인 자유를 제한하자는 태도이며, 개인이 결정할 문제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개인의 가치 판단이 충분히 이뤄진 상황에서 타인이 그 결정에 영향을 주려는 행위는 강요나 다름없다.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남에게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마지막 문단, 마지막 줄의 경우, 책임을 도입한다면 부작용 또한 개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며, 윤리적인 면에서 “좋지 않다”는 모호한 표현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남에게 강제적으로 투영하려는 행위는 해당 부분에서 “태아의 행복을 산모가 결정할 수 없다”라는 주장과 모순된다.

낙태반대론에서 생명이 1순위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제적 문제를 마치 사회적 인신과 제도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당장 사회적 편견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미혼모와 미혼부에게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불과할 수 있다. 그리고 낙태 이야기를 할때 경제적 혹은 피임 문제를 넘기는 것은 또 다른 무책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 문제를 무시하는 것은 장자가 돈이 없어 친구에게 돈을 부탁하러 갔는데 친구가 주기 싫으니 다음에 돈이 들어온다며 핑계를 되자 장자가 물고기 이야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 실수 안 하면 하지 않으면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왜 중국 같은 나라에서 강제로 인구를 조정하겠는가. 애당초 그게 조절이 된다면 불륜이나 사생아가 발생이 왜 되겠는가. 그리고 피임의 책임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에게 대다수 있다. 질내사정을 하는 쪽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이기 때문이다. 일단 남자가 물리적으로 힘이 세기에 여성이 거부해도 질내사정을 할 수 있다. 이는 물론 성폭행이 되지만 서로 관계를 맺다 흥분한 남성이 사정을 자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영화 《굿바이 싱글》이 이런 미혼모의 사정을 잘 이야기 해준다. 낙태가 나쁘다고 말하는 주연에게 미혼모는 그럼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지 일침을 가하자 이에 대해서 말하지 못한다. 즉 경제적 문제는 낙태 문제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생명은 굉장히 소중하다. 하지만 사회적 이면에는 돈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과 돈이 없어 병의 시달리다 죽는 사람 등 금전과 생명은 연결되어있다. 가난은 사람을 비참하고 동시에 폭력적으로 만든다. 미혼모와 미혼부가 처음에는 본성으로 아이를 키우겠지만 동시에 가난에 지친다면 그 폭력이 어디로 향할지는 뻔한 문제다.

바로 아무런 편견 없이 미혼모 혹은 미혼부을 도와주는 종교인들이다. 비록 종교를 좋게 보지 않는 사람도 많지만, 종교계는 낙태를 반대하는 동시에 단순히 생명의 소중함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분들은 미혼모 혹은 미혼부를 도와주고 만약 그들이 키울 수 없다면 고아원과 베이비박스를 만들어 그 생명을 지켜준다. 굿바이 싱글에서 미혼모가 결국에 도움을 받는 곳은 기독계 계열에서 운영하는 미혼모 센터다. 필요한 여러 가지를 도와주며 입양도 돕는다. 누군가는 위선이라고 욕할 수 있겠으나 이에 반대하면서 경제적 문제를 돕고 있다.

이는 낙태 찬성론자들도 본받아야 한다. 찬성론자들이 경제적 이유를 들어 낙태를 허용하자는 것은 생명을 1순위로 두어야 하는 사회 윤리에 어긋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비록 자기 결정이라고 해도 미혼모가 낙태로 가질 죄책감과 혹시 낙태로 인한 후에 임신 불가 등 여러 문제가 산재한다. 그리고 낙태는 절대로 공짜가 아니며 병원 입원과 치료가 병행되어야 한다. 즉 낙태 찬성자들은 낙태 반대론자 못지 않게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셈이다.

결국 낙태 문제는 찬성과 반대 어느 쪽의 손도 들어줄 수 없지만, 올바른 행동은 존재한다. 둘 다 미혼모와 미혼부의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것과 그들이 사회적 안전망의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낙태를 한다면 이를 단순히 비난하지 말고 설득과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낙태의 비율을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만약 하겠다면 낙태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도와줌으로써 후에 생활의 지장 없게 해주어야 한다.

결국 낙태는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범죄 혹은 건강의 문제가 아닌 임신을 낙태하려 했을 때 사회안전망이 최대한 발휘되어야 낙태 문제는 성립된다. 여기에 뜬구름 잡는 이야기나 그럴싸한 현실적인 이야기도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혼모와 미혼부란 말과 함께 이들이 비판받는 것은 정식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을 무책임 이전에 터부시하는 시선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이 미혼모와 미혼부는 경제적 약자가 대다수라는 점이다. 만약 미혼부와 미혼모가 경제적 지위가 높다면 과연 터부당할 위치가 아닐 것 이다. 결국 낙태의 문제 보다는 사회적 지위에서 오는 차별과 시선이다.